가장 보통의 하루2017. 9. 12. 23:13

 

오늘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전시를 보러 갈 계획은 아니었다. 아직 빌려 온 책을 절반도 채 읽지 못했고, 엄마에게 줄 그림도 완성해야 하는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패닉이 왔다. 갑자기 덜덜 떨리기 시작한 심장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나는 계획에도 없던 전시를 보러 가려고 집을 나섰다. 쏟아지는 햇볕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도서관 앞 길은 공사 중이었다. 노원역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앉았는데 하교 시간인지 땀을 흘리는 중학생 남자 아이들 여럿이 버스에 올라탔다. 소란스러운 소음에 섞여 있으니 조금씩 들뜬 마음도 가라앉았다. 역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마을버스라 동네 구석구석을 흝으며 사람들을 실어내리기 때문이겠지.

버스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어린이대공원역에 내렸다. 역에서 본다빈치뮤지엄은 가까웠다. 뭐든 상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는데, 모네 전시는 빛으로 쏴서 작품을 감상하는 특별기획 전시였다. 아마 그런 줄 알았더라면 가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이미 나는 왔고, 예매해 둔 티켓을 찾았고, 오디오 북을 다운 받았다. 처음 들어보는 오디오 북은 순서대로 자동 재생이 되지 않았고, 듣고 있는 동안 핸드폰의 다른 기능을 쓸 수 없었으며, 내용 또한 부실했다. 차근차근 전시를 즐기고 싶었던 나는 초반 3개 정도의 설명을 들은 후, 나머지 부분은 띄워진 원고를 속독한 후 오디오 북을 껐다. 나는 필사적으로 전시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으나, 사실 그러지 못했다. 출판사에선 메일을 읽었을까. 담당자는 어떤 사람일까. 끝없이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침투했다. 평일 오후라 전시회장은 한산했다. 그래, 지나치게 한산하기 때문이다.

 

 

전시를 모두 둘러보는 데는 한 시간 가량 소요됐다. 기억 속에라도 박제하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전시장을 나와 어린이대공원 방향으로 걸었다. 이미 많이 걸었지만 이대로 집으로 가기엔 충분치가 않았다. 처음 들어가 보는 서울 어린이대공원은 정말 어마 무지하게 커 보였다. 입장료가 없어서 부담 없이 들어선 공원 입구엔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나온 엄마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어제 잠들기 전 읽었던 기사가 스치듯 떠올랐다. 노키즈존에 대한 기사였는데, 어디부터가 차별이고 권리인지 알기 힘든 각자의 입장과 혼란스러운 언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느 쪽으로도 분명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내 입장이 스스로도 난처했지만, 아직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노키즈존과 기사 속에 등장하는 유난스런 엄마들이 그저 다른 세계의 모습인 것만 같았다. 아직은.

 

 

나무 그늘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시원했다. 이렇게 여름이 지나가는 거구나, 싶을 만큼. 가을 냄새가 나는 바람이었다.

- 우리 남산은 언제 가?

- 우리 봄부터 내내 남산 얘기하고 있어.

- 그러니까, 언제 가? 이러다 겨울 오겠어.

- 내가 안 아픈 게 최고라며.

- 응. 근데 안 아프니까 자꾸 욕심이 생기네.

문득 네가 아프던 시간들이 너무나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지나온 그 시간이, 왜 자꾸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지. 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이 생생한 것도 아니면서. 어쩌면 흐릿해져만 가는 기억을 이렇게라도 붙잡으려고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인지도, 지금은 모르겠지.

 

 

점점 다리가 아파와서 서둘러 공원 밖으로 나왔다. 초코바 하나와 단 커피를 마시며 에너지를 채워 넣었다. 초콜릿을 꼭꼭 씹어 삼키며, 나도 어린이대공원엘 간 적이 있었겠지. 엄마가 찍어 준 사진 속 어린 내 모습을 떠올리며,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 어릴 때 집 근처에 어린이대공원이 있었는데, 아빠가 자전거 앞 바구니에 날 앉혀서 태워줬던 거 생각나.

너의 그런 기억들이 부러웠다.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그저 웃고 있는 사진만 남겨져 있을 뿐.

 

집에 돌아와서 늦는다는 네 문자를 받자마자 혼자 저녁을 차려 먹었다. 함께 먹으려고 사온 소고기를 구워서 샐러드와 같이 먹었다. 배가 든든해지니 우울했던 감정도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아니, 왜 우울했지? 아마도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읽은 책 때문이겠지.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 에서 세번째 단편인 건너편을 읽은 탓이리라, 그리고, 음악. K가 들어 보라고 추천해 준 iron&wine의 fever dream을 반복 재생해 놓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 감정 또한 내가 선택한 것이다. 음악을 고르 듯. 그렇게 오늘은 조금 흐린 감정을 골라 담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거웠던 마음이 덜어졌다. 그러고 나니 이제 곧 자정이다. 오늘은 어떤 꿈을 꾸게 될까. 슬픈 꿈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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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inter_story